일상속 사역의 원리들5분

변화: 왜 그렇게 어려운가?

우리는 분명히 잘못인 줄 알면서도 왜 죄로 돌아가는가. 세 가지 이유입니다 — 그것이 우리의 본성이고, 마음에 품은 것이 행동으로 나오며, 자기기만의 안개가 판단력을 흐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계산은 끝났고, 이제 "아니오"라고 말할 자유가 생겼으며, 성령이 내면의 오염을 제거하기 시작하십니다. Lifestyle Discipleship 7장 — "변화: 왜 그렇게 어려운가?"

변화: 왜 그렇게 어려운가?

우리는 누구나 변하고 싶어합니다. 술을 끊고 싶고, 화를 줄이고 싶고, 더 좋은 부모가 되고 싶습니다. 작심삼일이 반복되고, 결심은 있는데 실천이 따라오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의지가 약해서일까요? 아니면 더 깊은 이유가 있는 걸까요?

짐 피터슨은 7장에서 이 질문을 정면으로 다룹니다. 그리고 성경과 프로이트가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같은 답을 가리키고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왜 알면서도 죄를 짓는가

피터슨은 세 가지 이유를 제시합니다.

첫째, 그것이 우리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죄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악한 생각, 음란,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독, 속임, 음탕, 질투, 비방, 교만, 우매함 —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 7:21-23). 피터슨은 이렇게 씁니다. 만약 우리가 악의 흔적이 전혀 없는 완벽한 환경에 놓인다 해도, 우리 스스로 그것을 망가뜨릴 것이라고. 악마의 도움도, 나쁜 친구들도 필요 없습니다. 오염의 근원이 바로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우리가 스스로 그렇게 프로그래밍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약 1:14-15). 피터슨은 이것을 임신에 비유합니다. 죄의 욕망이라는 씨앗을 마음에 품고, 그것을 키우고, 돌보면 — 결국 그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 옵니다. 오늘 우리 마음이 무엇을 먹느냐가 내일 우리의 모습을 결정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프로이트의 이드(id) 이론이 이 지점에서 놀랍도록 겹칩니다. 프로이트는 죄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지만, 행동은 무의식의 저장고에서 나온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셋째, 우리가 눈이 멀고 비합리적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가장 충격적인 이유입니다. 피터슨은 말합니다. 이것은 프로이트가 놓친 것이고,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결코 인정하려 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모순된 삶을 살면서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자기기만의 안개가 판단력을 마비시킵니다.

이사야 44장의 나무꾼 이야기가 이것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한 남자가 나무를 심고 수년간 가꿉니다. 어느 날 그 나무를 베어 절반은 불에 태워 빵을 굽고, 나머지로는 신상을 만들어 절합니다. "나를 구원하소서. 당신이 나의 신이십니다." 이사야는 개탄합니다. "내 오른손에 있는 이것이 거짓이 아닌가?"라고 스스로 묻지 못합니다. 이것이 비합리성입니다. 이 이야기는 고대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지성인들도, 과학자들도, 입법자들도, 그리고 당신과 나도 이 나무꾼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가망이 없는가

이 지점에서 피터슨은 말합니다. 이것이 절망적으로 들린다면 맞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의도입니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이 세 가지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변화에 관한 한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야기가 바뀝니다.


좋은 소식: 세 가지 새로운 현실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에게는 세 가지 근본적인 것이 달라집니다.

먼저 죄에 대해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피터슨은 이것을 "계산이 끝났다(We're paid up)"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법에 따르면 죄의 형벌은 사망입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우리도 함께 죽었습니다. 그분이 부활하실 때 우리도 함께 살아났습니다. 죄의 빚이 청산되었습니다. 죄가 더 이상 우리에게 권리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롬 6:3-8).

다음으로 더 이상 노예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모두 죄의 노예라고 하셨습니다. 회심 전에는 죄에 "예스"라고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는 선택지가 생겼습니다.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이것은 의무가 아닙니다. 피터슨은 한번은 익사 직전의 열두 살 소년을 구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 소년을 물에서 건진 후 셋이 강둑에 앉아 있을 때, 아무 말도 필요 없었다고 합니다. 그 죽음에서 생명으로 구출된 경험 자체가 모든 것을 말했습니다. 바울의 권면이 이것입니다. "생명에서 죽음으로 인도함을 받은 자로서 너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라"(롬 6:13). 구조된 사람이 구조자에게 자신을 드리는 것 — 그것이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령이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성령이 내면의 오염 제거 작업을 시작하십니다. 우리 마음의 식단을 바꾸기 시작하십니다. 파괴적 기억들이 진리 아래로 희미해지기 시작합니다. 자기기만의 안개가 걷히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 이 가능성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변화는 가능하다 — 단 한 가지 조건으로

예수님의 말씀이 7장의 결론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 8:32, 36). 예수님이 말씀하셨을 때 청중은 비합리적으로 반응했습니다. "우리는 노예였던 적이 없는데 무슨 자유를 말하는 것이냐?" 자기기만이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변화는 가능합니다. 그러나 자기 의지와 더 강한 결심으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죄에 대해 죽었고, 더 이상 노예가 아니며, 성령이 내 안에 계신다는 이 세 가지 진리를 붙드는 것에서 옵니다. 그리고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8장에서 피터슨은 이 해방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일곱 가지 요소로 구체적으로 풀어갑니다.